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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역사

조선시대 제11대 중종 이역에 관한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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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운이 좋은 제11대 왕 중종

조선시대 제11대 왕 중종은 제9대 왕 성종과 계비인 정현왕후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납니다.

왕자 시절의 이름은 진성대군입니다. 이복형인 연산군의 폭정 이후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릅니다.

연산군 시대의 폐해를 바꾸기 위하여 조광조와 같은 신진 세력을 이용해 왕권 강화를 시도하지만 나중에

기묘사화로 인하여 그들을 숙청합니다.

중종 진성대군 하면 연산군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연산군과 진성대군은 12살의 나이 차이가 나는 이복형제였습니다.

연산군의 폭정이 계속되자 박원종, 유순정, 성희 안을 중심으로 반정이 일어납니다. 그때까지 진성대군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당시 왕위를 받을 사람이 진성대군 밖에 없어 하루아침에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때 중종의 나이는 19살이었습니다. 그런데 중종은 19살이 될 때까지 단 한 번도 왕위 수업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연산군의 무능하고 폭정에 운 좋게 왕이 된 것입니다. 정통성이 아닌 신하들에 의해 임금이 된 것입니다.

오늘날로 이야기를 한다면 바지사장 같은 개념인 것입니다.

자신은 왕이 될 거라는 생각은 전혀 못했었는데 자고 일어나니 왕이 된 것입니다.

중종의 시대가 아니라 중종을 왕으로 만든 반정의 주역인 박원종, 성희한, 유순정의 시대 즉 신하들의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시대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중종이 왕이 되고 박원종이 4년 유순정이 6년 성희 안이 7년 지나 모두 세상을 떠났습니다. 막강한 권력에 집착하던 이들도 죽음 앞에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중종의 사람이자 대표적인 신하 조광조

중종이 왕위에 오른 지 10년 허수아비처럼 10년을 지낸 중종의 옆에는 자신을 왕위로 만든 신하들도 다 죽고 이제 자신의 포부를 세상에 펼치고자 마음을 먹습니다. 그런데 중종은 뭐부터 해야 할지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단 한 번도

왕세자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자신을 보필할 유능한 신하가 필요했습니다.

그게 바로 그 유명한 조광조입니다.

조광조는 1510년에 과거 1차에 장원으로 과거에 합격을 하고 그는 이후 사림파의 핵심인물로 자리매김하여 성리학의 이념을 실천하고자 하여 개혁정치를 실행합니다.

조광조는 급진적인 개혁가 스타일이었습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역사를 배울 때 조광조의 업적에 대해 자세히 얘기했던 것이 기억이 날 겁니다. 그의 업적을 구체적으로 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소격서 폐지가 있습니다. 

조광조는 사림파의 실질적인 인물로 사림파의 당시 사상은 성리학 이외에 불교, 도교 등 유교 외에 다른 종교는 모두 이단이라고 생각을 하고 배제하였습니다. 당시 유교 국가인 조선에 도교는 국가 기관에 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조선의 관청 중에서 소격서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은 도교와 관련한 제사와 의식을 진행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못마땅히 여겼던 조광조는 폐지를 주장하고 결국 폐지를 하게 됩니다.

그다음으로 향약의 보금과 현량과 실시를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향약이란 향촌사회의 자치규약을 말합니다. 지방의 질서를 안정시키기 위해 자치규약으로 만들어진 향약은 동시에 지방에 대한 사림의 영향력을 강화시켰습니다.

또 현량과란 시험을 보지 않고 품성이 좋은 사람을 추천하여 관리로 쓰자고 중종에게 건의를 합니다.

중종은 이를 수용합니다. 이것은 조선 최초에 있었던 일이지요. 오늘날에 낙하산 개념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조선 최고의 승진 그리고 버림받은 남자 조광조

조광조는 중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기에 초고속 승진을 합니다. 4년도 안 되는 시간에 문과에 급제하여 초고속으로 사헌부 대사헌이라는 종 2품에 해당하는 계급까지 올라갑니다. 오늘날로 따진다면 검찰총장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공무원 갓 시작한 사람이 4년도 안 되는 시간에 검찰총장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기초를 다지지 않고 급하게 이룬 것은 금방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찬란하기만 할 줄 알았던 조광조에게도 끝이 다가옵니다. 바로 기묘사화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조광조는 실세가 되니 날이 갈수록 기고만장해져 갔습니다. 조광조의 반대세력인 훈구파들은 조광조를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작은 술수를 씁니다. 어느 날 훈구파들은 주초위왕이라는 나뭇잎을 중종에게 보여줍니다.

주초위왕이란 조 씨가 왕이 된다라는 뜻이었습니다. 이걸 본 중종은 아무리 자기의 최고 신임을 하던 조광조라 한들 반역을 꾀했다는 걸 보고 화가 머리끝까지 납니다. 자신 또한 반정을 통하여 왕이 되었는데 자기가 당할까 봐 엄청 두려웠던 것이지요. 그래서 중종은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립니다. 이 사건이 기묘년에 일어나 우리가 잘 아는 기묘사화입니다.

조광조가 죽자 중종의 왕권에 대한 개혁의 지도 사라집니다. 물론 변심을 했지만 자신과 뜻이 가장 잘 맞는 사람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중종은 38년이나 재위를 했는데 우리들이 중종보다 조광조를 기억한다는 것을 보면 조광조의 업적이 그만큼 대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봤을 때 우리는 하나의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이든 단계라는 게 있다는 것입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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